안녕하세요 힐링라일라입니다. 오늘은 삼일절인데요 3월 1일이 되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선열들의 목숨을 건 투쟁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우리나라의 독립이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그 역사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3.1운동의 태동과 그 결과 및 영향력, 하룻밤에 읽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알려드립니다
미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세계평화안, 해외에서 3.1 운동의 불을 지피다
1918년은 제 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때였습니다. 이와중에 러시아에서는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발발하는 등 국제질서는 큰 후폭풍에 휘말렸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전쟁방지와 새로운 국제 질서 수립을 위해 14개 조하에 이르는 세계평화안(1918년 1월)을 제시했습니다.
문제는 이 평화안 속에 들어 있는 민족자결주의 였습니다. '식민지 주권과 같은 모든 문제를 결정함에 있어서는 식민지 주민의 이해가 공정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평화안 속에 담겨 있는 이 조항은 세계 피억압민중들에게는 희망의 메세지였습니다. 그러나 행간속에 숨은 알맹이는 사실상 그렇지 않았습니다. 진짜 내용은 곳일, 터키, 등 패전국의 세력 약화를 위해 그 식민지를 해방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는 사실상 애초부터 해당사항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수많은 식민지, 약소국 민중들이 환호했던 것은 이 조항이 제국주의 세력에서 벗어나는 절호의 단초가 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민족자결주의를 활용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1918년 11월에는 만주, 러시아, 미주 등지의 해외 망명지사 39인이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상하이에서 조직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에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도쿄에서도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렇듯 해외에서 분출하는 열기는 국내에도 전해져 만세운동의 분위기를급격히 고조시켰습니다.
3.3 운동이 될수도 있었던 3.1 만세시위
국내에서의 만세운동은 손병희, 최린을 중심으로 하는 천도교, 이승훈 등의 기독교, 한용운의 불교 등 종교계와 학생층을 중심으로 은밀하게 준비되었습니다. 결사의 자유가 없었던 무단 통치하에서는 이들이야 말로 유일하게 조직화된 세력이었기 땨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투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거사일을 어느날로 잡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고종의 국상인 3월 3일로 하자는 안, 국상일에 소란을 피우는 것은 불경이므로 1일이나 2일에 하자는 안, 2일은 일요일이므로 불가하다는 기독교 측 반대가 뒤엉켜 갑론을박 계속 되었습니다.
결국 3월 3일로 날짜가 잡혔으나 뜻하지 않은 기밀누설 때문에 황급히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고등계 형사 신철이라는 자가 천도교 계통의 인쇄소인 보성사를 급습하여 독립선언서를 빼돌렸던 것입니다. 이에 최린이 신철을 만나 5천원을 건네며 며칠간 입을 다물어 줄것을 부탁했고 아에 신철은 출장을 핑계삼아 만주로 몸을 피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위 지도부는 안심하지 못하고 예정된 거사실을 1일로 앞당기게 됩니다. 만주에서 돌아온 신철은 이 사실이 알려져 결국 경성헌병대 감옥안에 갇혔다가 자살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런데 계획이 바뀐것은 거사일만이 아니었습니다. 민족대표 33인이 탑골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한 계획도 하루 전날 2월 28일로 변경이 되었습니다. 학생대표자들과의 합의를 깨고 장소를 변경하여 그들만의 선언식을 개최하기로 한것입니다. 당시 서울에는 고종의 국상을 맞아 10만이 넘는 군중이 운집해 있었고 민족대표들은 고종의 독살설이 떠올라 격앙된 민중앞에서 독립선언을 낭독할 경우 자칫 유혈참극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서둘러 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뒤 일제 경찰에 자수해버리게 됩니다.
경성학교 출신 정재용의 선언서 전국 민족투쟁의 불을 지피다
3월 1일 오후 2시 약속대로 탑골공원에 모여있던 학생들은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자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경신학교 출신의 34세 청년 정재용이 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본격적인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습니다. 만세삼창을 마친 시위대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 시가지를 행진했습니다.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던 시위대열은 점차 민중들이 합세하며 순식간에 불어났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하려던 사람들, 철시한 상인들, 학생과 기생들, 아기업은 여인, 노인을 가리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이들은 종로, 남재문, 광화문, 명동 등 서울 거리를 휩쓸며 밤 11시가 넘도록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서울에서의 투쟁 소식이 전해지자 곧 전국이 들썩이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세가 강해 일찍부터 개화의 바람이 불었던 평안, 황해도 지역은 물론 의병투장의 전통이 강했던 경기, 충청, 전라, 경상 등 만세운동의 바람은 곳곳에서 거세게 휘몰아 폈습니다.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은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에 이르는 시기 동안 절정을 향해 달렸습니다. 전국 220개군 가운데 212군에서 시위가 벌어져 2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투쟁에 참가했으니 가히 거족적이었습니다. 국내의 투쟁소식은 해외로도 전해져 용정 등 간도지방 곳곳애서도 동조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필라델피아, 동경에서도 잇달아 시위가 벌어지는 등 세계 속속, 조선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독립을 향한 열정과 행동이 불타올랐습니다.
일제의 잔인했던 진압, 파리강화외의에서의 조선외면
일제는 3월 중순 까지만 해도 만세시위가 찻잔속의 태풍으로 그칠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투쟁의 수위가 날로 높아지자 3월 26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본격적인 탄압에 돌입했습니다. 평화적인 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진압방식은 잔인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일본도를 휘둘러 시위대를 난자하는가 하면 비무장의 민간인들에게 거침없이 발포하여 수많은 인명을 살상했습니다. 또 감옥에 끌려간 사람들 역시 잔인한 고문 끝에 절명한 경우가 부지기수였습니다. 3.1운동이후 조사된 바에 따르면 공식 사망자 7645명, 부상 4만 5562명. 체포 4만 9811명, 가옥, 교회, 학교의 손실등 엄청난 인적 물척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또 체포된 사람들 역시 주동자급은 10~15년의 중형선고를 받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민족대표라 불리던 33인이 대부분 2~3년의 가벼운 형에 그친것과는 대조적인 처벌이었습니다.
일제의 잔인한 탄압에 견디다 못한 시위대도 마침내 무력투쟁에 나섰습니다.투쟁이 후기로 접어들고 노동자, 농민 등 기층민중이 전면에 나서며 이런상황은 더욱 빈발했습니다. 이들은 곡괭이와 쇠스랑을 들고 일제 헌병대와 면사무소, 천일 지주집을 습격하고 때로는 일제 관헌을 살해하는 등 격렬한 투쟁을 이어나갔습니다. 억눌려왔던 민중의 민족적, 계급적 분노가 드디어 활화산처럼 분출된 것입니다.
하지만 뜨겁게 전개되었던 3.1운동은 뚜렷한 결실을 맺지 못한 채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기대했던 파리강화회의는 끝내 조선의 상황을 외면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던 미국이 막상 일본을 지지 한다는 사실이 명확해지자 투쟁의 열기는 식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민족해방운동의 좌표가 된 3.1 운동, 그리고 중차대한 과제
그러나 3.1 운동은 일제의 10년 치하에서도 독립을 향한 강인한 투쟁정신이 살아 있음을 입증하는 계기였습니다. 우리민족은 대규모 학살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았고 이것은 조선과 비슷한 처지였던 수많은 피억압민족에게 용기와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또 3.1 운동은 독립을 위한 유일한 방책이 강대국의 시혜가 아닌 미녹 자신의 투쟁뿐이라는 사실이 명확해짐으로써 이후 민족운동은 더욱 비타협적인 투쟁을 벌여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3.1운동은 중차대한 과제도 남겼습니다. 수백만이 참여한 거족적 투쟁이 실패로 돌아간것은 무엇보다 통일적인 지휘부의 부재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이후 민족운동세력이 독립운동의 구심점 마련을 위한 행동에 돌입하고 임시정부 결성 움직임이 표출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국제 민족해방운동에 큰 파급력을 미친 3.1 운동
3.1운동은 국제 민족해방운동에 큰 파급력을 미쳤습니다. 중국의 5.4 운동 세력은 3.1 운동을 자신들의 모델로 적시했고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민족해방운동 세력 역시 3.1 운동을 통해 크게 고무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3.1 운동은 국내 뿐 아니라 국제적인 민족해방운동에까지 파급력을 미친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내용출처: 하룻밤에 읽는 한국 근현대사
최용범 , 이우형 저자(글)
페이퍼로드 · 2019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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